여성·소외 계층 더 많이 다루고왜곡된 묘사 삼가야

2021. 10. 22. 15:24웹진<미디어리터러시>


미디어가 사회의 소수자를 다루는 방식을 두고 흔히 ‘상징적 소멸(symbolic annihilation)’이 거론된다. 특정 집단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거나 부정적 측면을 과장해 그 존재를 부인한다는 의미다. 주류 집단의 시각으로 현실을 왜곡한다고 지적받아온 미디어가 스스로 이를 인정하고 변화를 추구하는 움직임이 미약하게나마 감지되고 있다. 넷플릭스의 다양성 보고서가 상징적 사례다.



주인공은 여전히 백인
지난 2월 공개된 넷플릭스 보고서(Inclusion in Netflix Original U.S. Scripted Series & Films)에는 넷플릭스가 2018~2019년 제공한 픽션 콘텐츠 306편(영화 126편, 시리즈 180편)의 등장인물과 제작진의 정체성을 분석한 내용이 담겨 있다. 넷플릭스 의뢰로 연구를 수행한 미국 USC 애넌버그 포용정책연구소는 등장인물(주연, 조연, 대사 있는 배역)의 젠더, 인종·민족, LGBTQ(레즈비언·게이·바이섹슈얼·트랜스젠더·퀴어), 장애인 비율 등을 살펴봤다.

넷플릭스는 이번 보고서를 통해 콘텐츠 속 등장인물의 ‘양성’ 평등이 잘 구현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 박스오피스 상위 100개 영화에서 여성 주연은 평균 41%인데 반해 넷플릭스 콘텐츠의 경우 영화 48.4%, 시리즈 54.5%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는 실제 미국인 중 여성 비율인 50.8%보다 높다.

그러나 다양한 성 정체성의 재현은 턱없이 부족하다. 미국인의 12%로 추산되는 LGBTQ가 주요 배역으로 등장한 비율은 2.3%에 불과했다. 성소수자 주·조연 중에서는 게이(2.7%)의 비중이 가장 높고, 레즈비언(1.5%), 양성애자(1%), 트랜스젠더(1% 미만) 순으로 나타났다. 성소수자 중에서도 남성 정체성을 가진 이들의 비중이 높았다는 의미다.

여전히 백인 중심으로 서사를 부여하는 관행도 확인됐다주요 배역을 8개 인종·민족으로 분류했더니 백인이 71.8%로 압도적인데, 이는 실제 인구 비율(60.1%)을 훨씬 상회한다. 넷플릭스 콘텐츠에서 두 번째로 많이 등장하는 인종·민족은 13%인 흑인(인구 비율 13.4%)이지만, 실제 미국 인구 구성으론 히스패닉·라틴계가 흑인보다 많다소수 민족인 아메리카인디언, 알래스카 원주민은 단 한 번도 주요 배역으로 나오지 않았다.

소수자성이 중첩된 캐릭터일수록 보이지 않는 현상도 확인됐다. 넷플릭스 콘텐츠의 주요 배역 중 백인이 아니면서 LGBTQ인 동시에, 여성이 주요 배역인 경우는 2년간 3명뿐이었다. 대사를 가진 배역 중 백인 남성은 39.7%로 백인 여성(24.1%)보다 많다. 비백인은 남성이 21.1%, 여성이 15.1% 등장했다. 실제로는 백인 남녀가 각 30%, 비백인 남녀가 각 20%인 현실이 왜곡된 것이다.

보고서는 카메라 뒤의 제작진 역시 백인 남성 중심으로 구성됐다는 점에 주목했다. 넷플릭스 영화의 감독·작가·프로듀서 중 백인은 85.4%, 비백인은 14.6%다. 성별로는 76.9%가 남성이다. 여성이 주도권을 쥔 작품에서 젠더 다양성이 더 보장된다는 분석도 이어졌다. 실제 영화 속 여성 인물 비중은 여성 작가 작품에서 70.7%인 반면, 비여성 작가 작품에선 37.6%에 그쳤다. 시리즈물의 여성 주연급도 여성이 1명 이상 제작에 참여한 작품에서 74.6%, 여성이 없는 작품에선 41%로 집계됐다.


한국 콘텐츠 속 여성 비율 39%
콘텐츠를 만들고 공급하는 주체의 다양성에 대해서는 넷플릭스 스스로 여러 차례 강조해온 가치기도 하다. 이번 보고서에 앞서 넷플릭스는 자사의 조직, 커뮤니티와 관련된 포용 보고서를 공개한 바 있다. 전 세계에서 인종과 문화적 다양성을 증진하는 콘텐츠 제작 환경을 구축하겠다며 ‘창작 발전 기금’ 조성 계획을 밝힌 이래 각 문화권의 콘텐츠 제작자를 지원·발굴하는 프로그램도 이어가고 있다.

이런 넷플릭스의 행보는 글로벌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플랫폼으로서 다양성·포용성이란 가치가 경쟁력이 된 현실을 보여준다. 넷플릭스의 다양성 보고서가 국내에서도 반향을 불러온 이유다.
그러나 한국의 대중 미디어 플랫폼에서 전격적 변화를 찾기는 어렵다. ‘왓챠’, ‘퍼플레이’와 같이 성평등·다양성에 특화된 OTT들이 이와 관련한 큐레이션을 선보이는 정도다. 최근 일부 드라마에서 여성 중심 서사를 펼치거나 고정 관념에서 벗어난 성소수자 재현이 이뤄지고 있으나 대형 플랫폼 차원의 자발적인 평가나 정책으로 이어지진 않고 있다.

국내 미디어 콘텐츠의 문화 다양성을 가늠할 수 있는 자료는 방송통신위원회와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의 미디어 다양성 조사 정도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이 수행한 ‘2019 미디어 다양성 조사’에서는 지상파·종합편성채널의 드라마 95개에 등장하는 2,713명 중 61.0%가 남성인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 한국의 남성 인구(2019년 9월)는 49.9%다. 현실에서 과반(50.1%)인 여성이 주요 배역으로 등장하는 경우는 39.0%에 그쳤다.

특정한 성에 대해 고정 관념을 재생산하는 경향도 드러났다. 현실에서 여성의 연령별 비율은 50세 이상이 높은데 드라마에선 20대 이하 또는 70세 이상 고령으로 재현됐다. 반면 49세 이하 비중이 높은 남성은 30~69세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대로 등장했다여성은 판매 종사자, 남성은 전문가나 기술직군으로 과다 재현되는 특성도 있다. 성소수자, 다문화가정, 북한이탈주민 등에 대한 분석은 조사에 포함되지 않았다.


소수자 왜곡과 사회적 혐오
문제는 이렇게 쉽게 외면 받는 존재의 삶에 미디어가 미치는 영향이다. 국가인권위원회의 2014년 ‘성적 지향·성별 정체성에 따른 차별 실태 조사’의 응답자 66.6%와 올해 ‘트랜스젠더 혐오 차별 실태 조사’ 응답자 76.1%는 영상 매체를 통해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한 혐오 표현을 접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5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조사’에서 대중매체를 통해 성소수자에 대한 부정적 정보를 접했다는 응답도 42.8%로 나타났다. 현실에서 만나기 어려운 이들을 간접적으로 접하는 창구인 미디어가 ‘암묵적 편견’을 강화하고, 이들에 대한 사회적 혐오를 생산하고 있는 셈이다.

당장의 숙제는 소수자를 더 적극적으로 가시화하는 일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 ‘디스클로저’에 출연한 트랜스젠더는 “트랜스젠더 미디어의 모든 문제엔 간단한 해결책이 있다. 더 만들면 된다. 그러면 지금까지 봐온 엉터리 묘사는 중요하지 않게 될 것”이라 말했다. 이는 성소수자를 비롯한 모든 소수자에 해당하는 이야기다. 극적 수단이 필요할 때 정형화된 모습으로 활용하는 차원이 아닌, 실제 존재하는 소수자의 다양한 모습을 담을 때 편견이 해소될 수 있다넷플릭스 보고서의 의미는 미디어가 그렇게 해도 된다는 점을 보여줬다는 데서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본 원고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정부광고 수수료를 지원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자세한 내용은 링크를 통해 확인해주세요. ↓↓

https://www.kpf.or.kr/front/intropage/intropageShow.do?page_id=48035c62865b4989a98bb3f860d076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