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신문은 왜 '지상 최후의 미디어'인가

2011. 4. 22. 13:36다독다독, 다시보기/미디어 리터러시





 

“장마가 그치면 햇살 뜨거운 날들이 오리라는 것을 알듯이, 그렇게 세상의 흐름을 환하게 알고자 원했다.……민주화가 실현되면, 올림픽이 끝나면, 대통령이 바뀌면, 네티즌의 세상이 되면, 상업대중문화가 아이들의 영혼을 빼앗는다면 세상이 어떻게 될까 나름대로 생각도 해보고, 예측도 해보려 했다. 그러나 그동안 나는 늘 잘 알지도 못하는 거대한 흐름에 휩쓸려서, 미래를 예측하기보다는 내가 있는 자리가 어딘지도 알기 어려웠다. 세상의 변화는 과속이었고, 과격하였다.”

1980년대 이후 세상변화를 지켜봐온 한 50대 지식인의 고백이 와 닿습니다. 문학평론가 이남호의 책 <문자제국 흥망사>(생각의나무, 2004)에서 털어놓은 말인데, 대중사회로의 변동, IT 정보화 사회로의 이동 이후 사람들은 기꺼이 휴대전화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컴퓨터의 감옥을 높게 지었으며, 지성과 이성의 성채를 허물며 세상을 더욱 더 유치한 놀이공원 수준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 안의 사람들도 변했는데요. 거칠고 무식하다는 것이 자기만의 개성으로 취급되고, 낯 뜨거운 자기고백은 인간적 솔직함으로 통하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 대중시대의 새로운 귀족으로 연예인 그룹이 등장했고, 무엇보다 인터넷과 TV라는 대중 미디어가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사회 쪽으로 등을 떠밀고 있습니다. 종래까지 정보 전달의 맨 앞에 있던 종이 신문과 ‘생각의 단위’였던 다양한 잡지 문화가 주도했던 사회와는 천양지차인데요. 여기에 대중사회는 트위터, 싸이월드 등 다양한 뉴미디어와 수백 개 채널을 헤아린다는 지상파, 케이블 TV가 보여주는 반문화 무교양의 무책임 등은 이미 우리 사회의 하수도로 지적 받고 있죠. 모든 방송 종사자들은 “시청자들에게 건강한 웃음과 가슴에 와 닿는 감동을 전하겠다”고 다짐하지만 그런 거짓말을 액면 그대로 듣는 이는 거의 없습니다. 

이런 고약한 물결의 첫 출발이자 진앙지로 나는 2001년의 한 사건을 지적합니다. 미디어빅뱅이라고 해서 신문이 퇴조하고, 엉뚱한 미디어들이 이상발달한 배경이기도 하지만, 당시 돌출했던 사건, 이후 주류 문화에 대한 강한 반감을 몰고 왔던 폭력적 사건이 바로 소설가 이문열이 썼던 각종 책에 대한 모의 장례식입니다. 그해 7월 이문열이 신문사 세무조사 중단을 요구하는 신문 칼럼을 쓰며 사안은 엉뚱하게 번졌는데요. 자신들을 김대중 정부의 암묵적인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홍위병으로 비유한 글에 시민단체 회원들이 분노했던 것이었죠. 이내 그들은 경기도 이천 그의 집필실에 몰려가 직접 공격을 하기도 했습니다.

주류 언론, 고급문화에 대한 거부감을 넘어 도를 넘은 공격은 보수 지식인에 대한 혐오를 굳혔고, 미디어 시장 판도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게 저의 판단입니다. 이후 종이 신문을 포함한 전통적 미디어는 보수 성향이라며 배척하는 분위기가 분명했고, 인터넷 미디어 등에는 쏠림현상이 여지없이 이어졌습니다. 그때 전후 우리사회가 미디어 빅뱅 현상이 뚜렷해진 것은 정상적인 시장 분화라기보다는 어쩌면 변칙적으로 등장한 문화 포퓰리즘이란 요소가 가장 컸는지도 모른다는 것은 상식에 속합니다. 이후 노무현 정부 들어 전통 미디어에 대한 압박과 뉴미디어에 대한 지원이 노골적으로 진행됐는데, 심지어 특정 메이저 언론사의 시장점유율을 일정 수준 이하로 제한하는 법령을 만들자는 실로 충격적인 견해까지 잠시 등장했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뜬금없는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주류언론에 대한 백안시와 적대적 관계 설정은 우리 사회에 남아있는 최소한의 지적 권위와 정보 유통망을 흠집 냈고, 끝내 반문화주의 무교양주의로 자리 잡을 줄은 당시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뒤늦게 종이신문의 가치를 말하고, 신문활용교육(NIE)을 말하곤 합니다. 얼마 전 정병국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읽기문화 진흥을 위해 NIE를 활성화 하겠다”고 밝히기도 했죠. 이를 위해 학교 현장 중심의 NIE의 경우 올해부터 2013년까지 3년간 98억8000만원을 투입한다고 합니다. 


 

 



늦게라도 할 것은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미디어시장이 얼마나 비정상적인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지, 그걸 제대로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얼마나 절실하며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지를 별도로 점검해야 옳습니다. 이런 구조적 점검 없이 종이신문을 말하고, 신문 읽기의 즐거움과 효용을 말하는 것은 이미 터져버린 댐을 손가락으로 막으려는 힘든 노력일 수도 있습니다. 하려면 제대로 하자는 제안이고, 대증요법에 그치지 말자는 나 홀로 목소리로 고백하지만 사실 신문은 내게, 그리고 한국 사회에 ‘최후의 미디어’입니다. 더 이상 정보량이 많고 잘 편집된 형태로 등장할 미디어는 없다고 단언합니다.


혹시 전달방식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신문은 영원할 것입니다. <장미의 이름>의 작가 움베르토는 “인터넷의 출현으로 책이 사라지게 될까”라는 질문에 그는“어떤 형태로든 책은 살아남을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책은 수저나 망치나 바퀴, 또는 가위 같은 것입니다. 수저보다 더 나은 수저는 발명할 수 없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책도 그렇고 신문도 ‘최후의 발명품’입니다. 왜 신문을 읽어야 하고, 몸에 좋고 두뇌에 훌륭한지는 이걸로 설명이 충분하다 생각합니다. 이제 이 굿 뉴스, 미디어의 '오래된 미래'인 신문을 포스트모던한 지금 시대에 더욱더 알릴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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