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와 과장, 예술적 상상력으로 현실 해석

2016. 12. 12. 12:00다독다독, 다시보기/지식창고


조홍식, 숭실대 정치학과 교수


[요약] 유럽 언론에서 풍자의 대표격인 만평의 지위는 대단합니다. 프랑스의 대표적 권위를 자랑하는 르몽드는 1면에 반드시 만평을 실어 강조합니다. 풍자와 저널리즘의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더 많은 표현의 자유


이 글에서 다루려는 것은 ‘풍자와 과장의 저널리즘’이다. 일단은 이미 역사가 긴 신문의 만평이나 뉴스를 패러디한 방송 프로그램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나 풍자와 과장의 저널리즘은 만평이나 패러디뿐 아니라 무궁무진한 발전 가능성을 안고 있다. 왜냐하면 객관성과 중립성의 틀로 규정되는 일반 저널리즘과 달리 풍자와 과장의 저널리즘은 오히려 이를 벗어나는 주관성과 상상력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저널리즘은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진리를 추구한다. 언론이 팩트를 정확하게 전달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사실을 왜곡하거나 은폐하는 언론은 언론의 기본적인 의무를 저버린 셈이다. 상상의 나래를 펴면서 기사를 작성하는 기자를 보고 “소설을 쓴다”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이와 동시에 우리는 언론이 뉴스를 선택해 중요도를 부여하고 취급하는 과정에서 매우 복합적인 주관성이 항상 개입한다는 사실을 안다. 뉴스와 보도는 그래서 언제나 객관성과 주관성이 뒤섞인 ‘이야기하기(Storytelling)’다. 언론의 오피니언 페이지는 객관성에 기초해 주관적 주장을 펴는 장이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만평과 패러디는 뉴스라는 재료를 갖고 소설 쓰기의 창의력을 발휘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저널리즘이다. 유럽 언론에서 만평의 지위는 대단하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 대표적 권위를 자랑하는 르몽드는 1면에 반드시 만평을 실어 강조하고 앞세운다. 특히 르몽드는 편집국장이 여러 번 바뀌었지만, 플랑튀라는 필명의 한 사람이 대표 만평가로 1980년대부터 30년 넘게 신문의 얼굴 역할을 해 왔다. 만평은 실제로 사설보다 훨씬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르몽드에 실린 플랑튀의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시사만평(출처: 파리 로이터/뉴시스)


만평은 사설과 달리 화백에게 더 많은 자유가 허용되기 때문에 표현의 영역이 그만큼 더 넓어진다. 글에서 우리가 상상이나 비유로 사용하는 부분들을 모두 그림으로 표현하면 매우 강한 메시지를 담게 된다. 대처 총리의 사례에서 만일 “정부의 억압적 정책으로 말미암아 국민의 원성이 자자하다”는 표현을 사설에서 사용했다면 과연 방송의 패러디처럼 강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었을지 의문이다. 그렇다고 사설이나 칼럼에서 ‘총리의 목을 치고 싶은 감정’을 언급할 수는 없을 것이다. 풍자와 과장이 허용되는 만평이나 패러디 같은 언론만이 누릴 수 있는 표현 방식이다. 독자나 시청자는 이미 이런 저널리즘의 특징을 잘 알기 때문에 충분한 거리를 두고 이해한다고 할 수 있다. 현실에서 벗어나지만 현실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저널리즘, 현실을 예술적 창의력을 갖고 해석하고 소개하고 설명하는 저널리즘이라는 뜻이다.



#한국, 서구에 비해 무딘 비판의 칼


한국도 풍자와 과장의 저널리즘이 존재하며 만평과 패러디가 요즘 꽤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가지는 몇 가지 구조적 한계를 지적할 수 있다. 우선 역사적으로 한국은 독재의 경험이 길고 민주화의 역사가 짧아 언론의 자유가 유럽만큼 확고하지는 않다. 국가와 정부를 둘러싼 엄숙주의가 여전히 만연해 비판의 수위를 알아서 조절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신문 만평의 비판적 기능은 상당히 발전한 반면, 방송에서 패러디는 ‘말장난’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패러디를 저널리즘의 영역보다는 오락 코미디 프로의 한 부분으로 전락시켰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방송 패러디는 정식 뉴스 전후에 자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방송 시간대 자체가 저널리즘의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다. 방송에 대한 정부의 입김이 여전히 강한 한국의 비민주성을 증명하는 셈이다.


한국에서는 문화적인 틀이 규정하는 표현의 한계도 명백해 보인다. 체면을 중시하는 전통적 유교 문화 때문인지 비판의 칼은 서구 문화에 비해 날카로움이 덜하다. 특히 야당 성향이 강한 언론의 경우 국가와 정부만을 비난의 대상으로 삼을 뿐 자신이 지지하는 진영이나 사회 세력에 대한 비판이나 반성의 풍자는 매우 제한적이다. 이는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과도한 진영 논리와도 일맥상통하는데 언론, 특히 풍자 저널리즘마저 이런 함정에 빠진다면 곤란하다. 반성과 자정의 기제가 작동하지 않고 보수와 진보, 여와 야의 대립만이 무대를 독점하면 만평이나 패러디는 웃음을 자아내는 풍자가 아니라 독기를 품은 야유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한동안 폭발적 인기를 끌었던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는 유머와 뉴스를 섞었고, 주관적 해석과 객관적 뉴스를 융합한 경우였다. 하지만 지속 가능하지 못했다는 점은 적절한 풍자와 과장의 저널리즘 만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었다. 풍자와 과장은 현실을 비판하는 만평가의 특권이다. 세상에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도 세상과 거리를 둔 사람의 특권이라는 말이다. 남에게 비난을 날리는 만평가가 정치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그의 특권은 무너지고 비난 자체가 신선한 유머의 발상이 아니라 더러운 정치 다툼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한국만의 새로운 시도가 독립적 장르로 정착하지 못하고 와해된 것은 안타깝다.


프랑스에서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이 터졌을 때 한국의 일부 지식인들이 보여준 태도는 언론의 자유에 대한 미숙한 사고를 드러냈다. 샤를리 에브도는 오래전부터 이슬람의 마호메트를 풍자한 만평으로 사회적 논란의 대상이 됐다. 편집진을 학살한 테러 공격은 이런 언론에 대한 야만적 복수의 형식이었다. 당시 한국의 지식인 상당수는 테러는 문제지만 타자의 종교를 비방하는 서방의 언론도 문제라는 식의 논리를 폈다. 약자에 대한 풍자 역시 악의적 야만이라는 주장이었다.

 

샤를리 에브도 최신호 표지. '다 용서한다(Tout est pardonne)'는 문구와
무함마드가 '내가 샤를리다(Je suis Charlie)'라는 글귀를 들고 있는 그림이 실렸다.
(출처: 한국일보)


하지만 이런 식으로 언론의 자유에 재갈을 물리기 시작하면 모든 비판은 통제의 잠재적 대상이 된다. 샤를리 에브도는 이슬람뿐 아니라 가톨릭, 유대교 등 모든 종교 세력의 근본주의나 극단주의를 비판해 왔다. 역사적으로 언론의 자유는 종교적 통제로부터의 해방으로 시작됐다. 또 유럽에서도 언론의 자유가 완전한 것은 아니며 증오나 폭력을 유발하는 내용은 법적 제약을 받는다. 다만 언론의 자기 검열이나 정부의 간섭이 아니라, 문제가 제기되면 사법부가 판결을 내리는 시스템이다.


샤를리 에브도 사건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일부 반응은 이상의 역사와 제도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됐다. 덧붙여 섣부른 약자 편들기가 한몫했는데 사실 세상에 절대적인 강자나 약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유럽의 이슬람 이민자 집단은 주류 기독교에 비해 약자지만 종교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여성이나 더 소수인 유대교에 대해서는 강자다. 만평이나 패러디가 저널리즘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언론의 자유에 대한 폭넓은 정의가 필수적이다.



#21세기 저널리즘


는 풍와 과의 저널리즘이야말로 가장 21세기적인 언론 형식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현대의 독자는 문자보다는 이미지가 훨씬 친숙한 세대가 다수를 차지한다. 그림이나 동영상에 비해 신문의 글이나 라디오의 말은 모두 간접적인 소통 방식이다. 적어도 한 번은 두뇌를 거쳐야 이해와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면 그림과 동영상은 직접 시청자에게 전달되어 즉각적인 반응을 끌어낸다. 속도에 익숙한 현대사회에서 어려운 칼럼이나 사설 한 편보다는 만평과 패러디가 더욱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풍자와 과장의 저널리즘은 그림과 동영상을 통해 더욱 압축적이고 따라서 더 경제적인 커뮤니케이션의 형식을 띤다. 글로 사례를 들어 표현하려면 상대적으로 긴 문단과 설명이 필요하지만 그림과 동영상이라면 한 컷으로 수많은 것을 표현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몸의 제스처나 얼굴 표정 하나가 긴 설명을 대신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독자의 입장에서 한 편의 사설이나 칼럼을 읽는 시간은 몇 분이 걸린다. 하지만 만평은 대개 10초 정도면 이해할 수 있다. 언론의 입장에서는 만평이 재미있어 뉴스를 찾아보고 자세히 들여다보는 1석2조의 효과도 누린다.


풍자나 과장의 저널리즘은 이미 만평과 패러디 영상에서 하나의 장르로 자리를 굳혔다. 글로 기사를 만들면 사실을 왜곡한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는 내용도 만평에서는 자연스럽게 수용되는 사회적 합의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풍자나 과장의 기법은 기사나 논평에서도 사용할 수 있지만 만평이나 패러디를 통해 더욱 자연스럽게 표현되고 받아들여진다. 독자나 시청자는 만평이나 패러디를 거리를 두고 해석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21세기는 여전히 사회의 많은 갈등과 이를 둘러싼 투쟁이 벌어지지만 동시에 과도한 호전성보다는 유머를 동반하는 여유와 거리 두기의 태도가 더 적합한 시대다. 만평이나 패러디를 반대하는 엄숙주의자들은 비판과 조롱이 증오와 폭력을 유발할 수 있다고 염려한다. 실제로 다수의 독재 국가에서 권력은 비판과 조롱을 참지 못하고 만평가를 탄압하고 고문하고 살해한다. 독재 권력이 이처럼 비판에 민감한 이유는 시민의 동의에 기초한 지배가 아니라 폭력으로 지배를 강요하는 데 있다. 하지만 민주 국가에서 만평과 패러디는 일상의 표현 방식이다. 시민들이 선택한 권력이고, 다수가 지지하는 정통성을 가졌기 때문에 누가 비웃는다고 무너지는 약한 정부가 아니다. 풍자를 허용한다는 것은 자신감과 정통성과 권위의 표현이라는 말이다. 정부건 사회 세력이건 개인이건 타인의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그래야만 자신도 타자를 비판할 권리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민주 사회에서도 풍자와 과장의 저널리즘을 불편해 하는 사람들은 만평이나 패러디가 사회 불신이나 불만을 자극할 수 있다고 걱정한다. 하지만 폭력과 마찬가지로 사회 불신이나 불만은 풍자와 과장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반영할 뿐이다. 무엇보다 풍자와 과장은 비평가와 대중의 상호관계에서 만들어진다. 시민의 호응이 없는 풍자는 비평가의 독백일 뿐이며, 감동을 선사하지 못하는 과장은 비뚤어진 편견으로 끝난다. 인기를 끄는 풍자와 과장의 저널리즘이란 비평가와 대중과 현실이 함께 [각주:1]공명(共鳴)해서 만들어 내는 결과라는 말이다.









  1. 공감하여 자기도 그와 같이 따르려 함. [본문으로]